‘민노총 간첩단’ 판결문 보니
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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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령을 받고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1심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민주노총 전 간부 석모씨가 재판 직후 “내가 (이)석기 형보다 거물이야?”라고 했던 것으로 21일 알려졌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석씨는 지난 8일 수원지법 형사14부(재판장 고권홍)가 자신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자 주변에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내란선동·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9년을 확정받았다. 법조계 한 인사는 “석씨가 수사와 재판에선 진술을 일절 거부하다가 막상 통진당 핵심인 이 전 의원보다 더 높은 형을 받자 본인도 놀란 것 같다”고 했다.
석씨는 2018년 10월~2022년 12월 총 102차례에 걸쳐 북한 지령을 받거나 보고문을 보낸 혐의 등을 받고 있다. 판결문과 지령 등을 보면, 북한은 석씨가 세운 지하조직 ‘지사’에 구체적인 민주노총 장악 방법을 하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픽=이철원 |
◇“정의당을 와해해 당원을 포섭하라”
북한은 석씨에게 “(민노총) 중앙에 2명으로 구성된 당소조나 비합법 소조를 내올 목표를 가지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소조’는 교원 지도를 받으며 예·복습 등을 하는 작은 모임을 뜻하는데, 북한 노동당이 지정하는 특정 당원을 책임자로 하는 새 조직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또 “조합원 수가 10만명이 넘는 금속노조를 확고히 걷어쥐는 것을 당면 목표로 내세우라”는 지시도 내려보냈다.
북한은 또 지하조직을 통해 전국 각지의 노조 및 시민단체 장악을 지시했다. 팀장급인 양모씨에게는 금속노조와 기아차지부 광주·화성공장 장악, 김모씨에게는 경기노동포럼과 경기중부민생민주평화연대를 지사의 외곽 단체로 만들라는 지령이 각각 하달됐다. 이 밖에 건설산업연맹 전기분과, 민주노총 인천·울산지역본부, 민주노총 현장활동가모임, 금속노조 전국현장조직추진위원회 등이 ‘공작 대상’으로 거론됐다.
특히 통진당 후신인 진보당 지지 세력을 늘리라는 지령도 수차례 내렸다. 2021년 2월 “정의당이 당대표 성추문 사건 등으로 위기”라면서 “정의당에 대한 분열 와해 공작으로 자주파 세력을 비롯한 일반 당원 대중을 떼내 진보당에 포섭시키라”고 지시했다.
한편 특정 정치인 공격도 지시했다. 북한 공작원은 2019년 4월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 대해 “나경원년의 과거 친일 행적을 까밝혀 ‘토착왜구’ ‘나아베’ ‘친일자위대원’으로 민심에 각인되기 위한 활동을 하라”고 했다. 2022년 12월에는 “윤석열 역도놈이 ‘종북주사파는 진보도 좌파도 아닌 적대적인 반국가 세력’이라는 악담을 늘어놨다”면서 “윤석열 역적 패당의 통일애국 세력에 대한 탄압 책동을 규탄하기 위한 실천 투쟁을 강도 높게 조직 전개하라”고 했다.
◇北에 수시로 충성맹세, 공작 상황 보고
석씨 역시 민주노총 내부 공작 상황을 수시로 북한에 보고했다. 석씨는 “민주노총 총국에 소모임인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김-김주의 사상’으로 무장되고 성원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으로 보이는 성원들을 적극 검토하는 사전 단계”라고 보고했다. 김-김주의는 북한의 통치 이념인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뜻한다.
석씨는 또 2020년 6월 “민주노총 인사권을 가진 위원장과 사무총장은 제 추천이면 모두 받아들여 인사에 반영하고 있다”고도 했다.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은 NL 계열 출신 김명환씨였다.
한편 석씨는 수시로 북한 김정은 일가에 대한 충성맹세문과 사상 학습 결과를 보냈다. 2020년 9월 충성맹세문에서 “남조선 혁명운동에 대한 김정은 동지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튼튼히 세우기 위한 사업에 모든 것을 다 바쳐나갈 것”이라며 “이남 사회에 김일성-김정일주의화 위업을 빛나게 실현하겠다”고 했다.
석씨가 관리하던 민주노총 내 지하조직인 ‘지사(간첩단)’의 규모는 최소 10여 명으로 추정된다. 석씨와 1·2·3팀장, 회계·통신·총무·연구과장과 각 팀장이 관리하던 팀원 등이다. 검찰 관계자는 “지령문 외에도 북한 공작원과의 접선 장면 등 수년간 수집된 증거가 있어 석씨 등 일부를 먼저 기소한 것”이라며 “추가 증거가 수집되면 다른 조직원들도 수사할 것”이라고 했다.
1심 재판부는 석씨와 북한 공작원 사이에 오간 지령문·보고문을 모두 유죄의 근거로 인정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북한의 지령문과 보고문은 당사자가 직접 법원에서 증언하지 않기 때문에 ‘전문증거’로 판단돼 증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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