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프라이터·보드카·영어 시집 한 권 넣고 떠난 소련 망명 시인
겨울이면 베네치아 머물며 성탄절마다 물과 시간이 그린 무늬 주제로 詩
“시간을 이겨낸 아름다움이 있다”… 혹독한 시절일수록 서정시를
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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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독일 시인 브레히트(Brecht)는 파시즘이 난무하던 자신의 시대를 그렇게 명명했다.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산뜻한 돛단배’니 ‘처녀의 젖가슴’이니 ‘꽃피는 사과나무’니 대신 ‘구부러진 나무’와 ‘찢어진 어망’과 ‘허리 굽은 40대 아낙네’에 대해 쓴다고 했다.
모든 시대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현재는 늘 힘겹고, 눈 닿는 곳마다 아름답기는커녕 추하고 슬픈 것이 더 많다. 요즘 세상의 행복 체감도는 한겨울만큼이나 냉랭해서 서정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난 서정적이고도 고독한 어떤 여행에 대해 쓰려 한다. 러시아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브로드스키(Brodsky)에 관한 얘기다.
타이프라이터와 보드카와 영어 시집 넣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소련에서 추방당한 것이 1972년, 영미권 작가·지식인의 도움으로 미국 대학에 자리 잡은 그해부터 그는 겨울이면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훌쩍 날아갔다. 한 달 남짓 겨울 휴가를 이용해 그곳 싸구려 호텔이나 비어 있는 친구 집에 머무르는 식이었다. 17년간 반복된 이 한 달살이의 결과물이 작은 산문집 ‘베네치아의 겨울빛’이다. 영어 원본 제목은 ‘물 자국(Watermark)’. 그가 떠나온 상트페테르부르크도 물과 다리와 운하의 도시였다.
자신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철새처럼 홀로 고향의 닮은꼴 도시에 날아들어 매년 새로운 성탄시를 쓰던, 그러면서 한 해와 작별하던 나그네 시인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기억과 고향과 아들 잃은 하숙생/ 전적으로 이름 없는 한 남자 나룻배에 올라탄다/ 레인코트 주머니엔 그라파 술 한 병/ 누가 그를 위해 울어주련가/ 등 뒤에서 흐느끼는 숲속 사시나무뿐.”(1973년 성탄시)
관광객 몰려드는 한여름의 베네치아에는 가지 않았다. 1백년 앞선 19세기 중·후반의 8월 한때, 아내와 같이 베네치아에 온 도스토옙스키가 나흘 내내 산마르코 광장 한곳에만 머물며 황홀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브로드스키는 자신의 연중행사에 또 다른 미학을 부여했다. 추상적인 계절 겨울의 칙칙하고 어두운 날빛 아래서는 외부로 향한 눈이 더 밝아지고, 그러면 저온에서만 드러나는 ‘진짜’ 아름다움이 보인다고 했다. 겨울의 베네치아는 어떠냐는 물음에 “수영하는 그레타 가르보를 닮았어요”라고 농담 삼아 던지던 그의 대꾸가 헛소리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베네치아는 결혼이 아니라 이혼을 위한 여행지라고 했다. “점점 희미해지는 황홀감을 느낄 배경으로” 그만한 데가 없다는 것이다. 밤 골목길은 도서관 서가와 비슷해서 두 곳 모두 조용하고, 모든 ‘책’은 굳게 닫혔다고도 했다. 브로드스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름 햇살과 밀월과 산마르코 광장이 아니다. “로맨틱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다만 일하기 위해, 작품을 끝내기 위해, 번역하고 시 몇 편 쓰기 위해… 그저 존재하기 위해” 베네치아에 온 시인은 물과 하나 되어, 말하자면 물의 눈으로 도시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자 했다.
바닷물이 범람하는 겨울 아콰 알타(만조 현상) 시기에 베네치아는 온통 거울의 도시로 변신하는데, 그러면 두 배로 늘어난 아름다움은 서로를 반영하며 자기도취에 빠져버린다. 그런 때 물이 보는 아름다움, 아름다움이 보는 아름다움을 그는 생각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겸손함과 감사함을 품은 채, 물이 해안에 그리는 레이스 같은 무늬를 응시했다”는 대목이 내게는 감동적이다.
그가 응시하는 물의 레이스 무늬가 실은 시간의 발자국이라고 이해된다. 시간과 물은 흘러가고, 그 흐름을 따라 모든 것도 사라진다. 그러나 또 뭔가는 남는다. 베네치아는 시간의 퇴적층인 ‘물 자국’이 아름다움으로 남은, 그런 도시다. 덧없음과 불멸의 증거물이다. 시간의 위력을 견뎌낸 아름다움 앞에서 유한 존재인 인간은 저절로 겸허와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 브로드스키에게는 이것이 시(詩)의 시작이다.
시간 앞에 속수무책인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시간을 이겨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브레히트는 광기와 위선을 가려 덮는 거짓 아름다움에 경악한 나머지 서정시를 거부했다. 그러나 광기와 위선의 추함을 익히 경험해 알고 있던 망명 시인 브로드스키는 일상의 온도가 떨어질수록 더욱더 또렷해지는 무한의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서정시를 고집했다. 그것이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왜냐면 우리는 가도 아름다움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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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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