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장고(長考) 끝에, 직접 이스라엘로 날아가 수상식에 참석한다. ‘벽과 알’은 하루키가 왜 욕을 먹으면서까지 ‘일부러’ 그 자리에 섰는가를 밝힌 수상 소감문이다. 요점‘마저’ 축약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수상을 거부하는 게 편리(便利)했을 겁니다. 고독했지만, 진심을 담아 이 글을 썼습니다. 나는 어떠한 전쟁도,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런 내가 여기서 이 글을 읽는 까닭은, ‘군중’들이 내게 이러지 않기를 강요해서입니다. 소설가는 자신의 성찰로 직접 부딪쳐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는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해 씁니다. 어느 편에서 하란다고 하고,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독자들을 외면하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심술쟁이마냥 거스르며 이 자리에서 나만의 메시지를 내 식으로 전합니다.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부딪쳐서 깨지는 알(egg)이 있다면, 나는 알의 편에 서겠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 폭격기, 전차, 로켓탄, 백린탄, 기관총은 높고 단단한 벽. 그것들에 불타고 총상을 입는 사람은 알입니다.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우리는 모두 개인입니다. 벽을 앞에 둔, 하나의 알입니다. 우리가 어떤 진실을 주장할 적에, 우리는 각자 자신 안의 진실의 소재를 ‘정확’하고 ‘정교’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자신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처럼, 그렇게 진실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 수 있다고 자문해보는 이가 몇이나 될까? 예술가가 우르르 몰려가 선언하고 돌팔매를 던지는 데에는 의외로 용기와 외로움이 필요치 않다. 도리어 이득을 취하기도 한다. 정치적 발언을 일삼으며 자신의 존재가 공중 부양된 것마냥 행동하는 예술가들 중에 평소 정작 자신의 분야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도 의문이다. 반으로 갈라진 대중을 따라 느닷없이 정의로워지고는, 조금만 이득이 훼손되면 자취를 감춘다.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은 가수에게 어느 쪽의 편을 들지 않는다고 인민재판 하는 사회. 하루키는 어느 편을 위해 선언하는 그런 ‘나댐 자체’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새는 하늘에서 노래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새장에 갇힌 구관조가 되어 시시껄렁한 말을 지껄이거나, 비둘기처럼 날개를 계단으로 사용한다. 말하는 것은 가수의 자유지만, 말 안 하는 것이야말로 가수의 자유다. 직업의 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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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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