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청동서 조각가 정현 개인전
조각가 정현이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1990년대~2000년대 초반 브론즈 조각 사이에 서 있다. 삽과 각목으로 내리쳐 압착한 투박한 인간 형상에 고뇌하는 얼굴, 서 있는 남자가 보인다. /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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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정현(69)의 작업은 ‘인간’에서 출발했다. 1990년대 삽과 각목으로 점토를 내리쳐 흙의 물성이 살아있는 인물 조각을 선보였다. 이후엔 상처 입은 재료로 눈을 돌렸다. 기찻길에 깔려 열차의 하중을 견디는 침목(枕木)을 깎아 세웠고, 폐철근과 녹슨 철조망처럼 오랜 세월을 견딘 재료를 통해 물질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드러냈다. “하찮은 것들이지만 시련을 겪고 남은 것들에 항상 끌린다”고 했다.
그가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The Cumulative Burst)’은 ‘인간’으로 회귀했다. 1991년 작업부터 2005년 신작까지 다양한 인체 형상과 두상 조각, 드로잉 84점으로 전시장을 빽빽하게 채웠다.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는 “그간 미술관을 중심으로 25차례 개인전을 했지만, 사람 다니는 공간보다 작품으로 꽉 들어찬 전시 기법은 처음이라 신선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박경미 PKM 갤러리 대표는 “정현의 응축된 시간과 에너지를 그대로 펼쳐내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조각가 정현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 전시 전경. /PKM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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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정현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삼청동 PKM 갤러리 전시 전경. /PKM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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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 위에 늘어선 조각들은 투박하지만 야생의 기운을 뿜어낸다. 뭉치고 깎이고 일그러진 형태에서 인간 존재가 겪어낸 시간과 굴곡이 드러난다. 어떤 조각엔 무릎 꿇고 고뇌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조각에선 고개 숙인 얼굴이, 또 옷자락을 휘감고 서 있는 남자가 보인다.
청계천 수표교 교각을 모티브로 만든 신작 ‘무제’(2025)가 갤러리 야외 정원에 설치된 모습. 215×147×118cm. /PKM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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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정현이 청계천 수표교 교각을 모티브로 만든 신작 '무제'(2025) 옆에 서 있다. /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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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트는 야외 정원에 설치된 대형 신작 조각 ‘무제’(2025). 청계천 수표교(水標橋) 교각을 모티브로 했다. 수표교는 조선 1420년(세종 2년) 현재의 청계천에 세워진 다리다. 눈금을 새겨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하천의 복개와 복원을 거치면서 현재는 장충단공원에 일부 남아있다. 정현은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다리 밑’에 주목했다. “수표교의 진짜 아름다움은 하단 교각에 있다. 별다른 기교 없이 무심하게 만들어진 돌의 형태, 오랜 세월을 견뎌낸 표면이야말로 한국적 미감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늘 아날로그 연장으로 작업해온 그가 3D 스캐너로 석조 교각을 측정해 데이터를 얻고 알루미늄 작품으로 녹여냈다.
작가는 “질감이 곧 정신”이라고 말한다. “돌은 깎으면 깎을수록 힘이 빠진다. 건드리지 않았을 때 갖고 있는 재료 자체의 힘, 물성이 스스로 뿜어내는 파워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했다. 버려진 물건이라도 잘 들여다보면 재료가 품은 이야기, 시간의 축적이 보인다.”
2019년 강원도 산불로 타버린 나무를 다시 태워 만든 신작 '무제'(2025). 고열에 태운 나무를 하얗게 분칠해 전시장에 내놨다. /PKM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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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버린 숯 조각도 작품이 됐다.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로 완전히 타버린 나무를 작가가 다시 태워 조각으로 만들었다. “시속 100km 바람에 불이 번지고, 강릉과 양양까지 다 타버렸다. 그 참혹한 현장을 스케치하고, 탄 나무들을 작업실로 옮겨왔다”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火葬)하듯 불탄 나무를 고열로 다시 태웠더니, 껍질이 벗겨지고 안쪽 아름다운 무늬가 드러났다. 그렇게 태운 나무를 화장(化粧)하듯 하얗게 분칠해 전시장에 내놨다.
홍익대 교수를 정년퇴직하고 작업에만 전념하는 그는 최근 미술시장에서도 ‘팔리는 작가’가 됐다. 지난해 12월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작품이 완판됐고,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박경미 대표는 “재료 자체의 아우라가 있고 야생의 본질이 남아있는 그의 조각을 국내외 컬렉터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전시는 12월 13일까지. 무료.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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