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2018년 10월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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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 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심에서도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선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일부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 탈퇴를 유도한 공소사실이 1심과 달리 유죄로 인정됐다.
서울고법 형사12-1부(재판장 홍지영)는 27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임 전 차장의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임 전 차장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공모해 각종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법원 내 진보성향 모임 활동을 축소하는 방안 검토를 지시하는 등의 혐의로 2018년 11월 기소됐다. 공소장에 적시된 혐의만 약 30개였다.
항소심에서는 1심에서 무죄가 나온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방안 검토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2017년 2월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는 ‘전문분야 연구회의 구성 및 지원에 관한 예규’에 따라 법원 내 연구모임에 중복 가입할 수 없으니 한 곳만 남기고 탈퇴하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가 판사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임 전 차장은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었던 박상언 판사에게 2016년 3월 ‘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 작성을 시켰고, 이 문건에는 ‘연구모임 중복 가입 해소’ 조처가 진보 성향 판사들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한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이와 관련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었던 김민수 판사가 임 전 차장 지시로 ‘연구모임 중복 가입 금지’를 위한 코트넷 공지글을 작성한 사실도 드러났다. 항소심 재판부는 “박상언·김민수에 대한 부분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제재하거나 위축시키려는 것으로서 직권남용에 해당하고, (심의관들이)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으로 보아 원심과 달리 유죄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재판부는 “피고인은 특정 법관이 일선 법원의 단독판사회의 의장으로 선출될 경우 사법행정에 부담을 주는 행위를 할 것이라고 예단해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하여금 의장 경선에 대응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했다”며 “검토 방안을 실제 실행에 옮겼다는 사정은 찾기 어려우나, 이런 피고인의 행위는 일선 법원 법관들이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선거에 개입하려고 한 것으로서 위법성의 정도가 가볍지 않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는 2016년 양승태 사법부에 비판적이었던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박노수 부장판사가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후보에 출마하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는 내용의 문건 작성을 심의관들에게 지시했다.
또한 2심은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 가면 판매를 중지시키기 위한 법적 압박 수단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박 전 대통령 가면 판매 사건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가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을 형상화한 가면을 판매하던 업체에 대해 법적 조처가 가능한지 검토해 달라고 법원행정처에 요청했던 일이다.
2심은 1심과 같이 임 전 차장이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와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법률 자문을 한 혐의도 유죄로 판단했다. 또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에서 고용노동부의 재항고 이유서 첨삭을 지시한 혐의, 메르스 사태 당시 박근혜 정부의 법적 책임을 면할 방법을 검토하도록 지시한 혐의도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삼권분립 원칙에 기초해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수호해야 할 책무를 저버리고, 재판의 공정성과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으로서 그 죄질이 좋지 않고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인권법연구회 위축 시도와 관련해선 “사법행정의 목표에 매몰된 나머지 내부적 비판을 경계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긴 결과이고, 피고인이 이 부분 범행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저지른 범행은 법관들이 다른 국가권력 및 내·외부 세력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재판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다해야 하는 본분을 망각한 것”이라며 “이는 사법부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다만 “사법부가 어렵게 쌓아 온 신뢰를 훼손시키고 법원 구성원들에게 큰 실망과 충격을 안긴 데 대해 무한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낀다고 피고인이 토로하고 있고, 이 사건으로 500일 넘게 구금되기도 한 사정을 반영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사법 농단 최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항소심 선고기일은 내년 1월30일 열린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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