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이순신 장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청주에서 이순신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순신이 청주에 들렀다거나 스쳐 지나가기라도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나마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에 관한 짤막한 내용이 있기는 하다.
1728년, 영조 즉위 4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이봉상은 충청도 병마절도사였으며 청주읍성에 있는 충청병영에 근무했다.
괴산 사람 이인좌는 경종이 영조에 의해 독살됐다고 믿고, 그의 원수를 갚아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신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청주읍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이봉상을 사로잡아, 자신들의 반란에 가담시키려 세 번이나 권유했다.
그러나 이봉상은 충무공의 자손임을 내세우고 조상의 충의를 저버릴 수 없다며 회유를 당당하게 거부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이후 이봉상과 함께 순절한 청주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 등 세 명의 충신을 위해, 1731년 청주성 북문 안에 사당과 함께 유적비를 세우고 삼충사라 불렀다.
이후 1736년 '표충사'로 사액을 받았으며 1939년에 현재 위치인 청주시 수동으로 이전됐다.
필자가 청주에서 이순신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 것은 우연히 가입한 동호회 활동 때문이다.
이 모임은 일명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로 회원들이 전국 각지에 분포해 있다.
이름 그대로 순수하게 이순신 장군에 관한 역사를 공부하고 장군의 뜻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임진왜란에 관한 내용도 공부한다.
이 모임을 알게 된 것은 이순신의 시조로 시조창을 하면서 시작됐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시름하는 적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긴 호흡으로 시조창을 하노라면 나라를 걱정하는 이순신의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이 모임에서는 그동안 통영, 창원, 여수, 남해, 부산 등 이순신의 해전과 관련된 지역을 답사했다.
이번에는 임진왜란과 청주성 탈환, 의병에 관한 내용을 알고자 지난 주말에 40여 명의 회원이 청주를 방문했다.
제일 먼저 수의동에 있는 송상현의 묘를 찾아 참배했다.
송상현은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 회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라 참배 분위기는 사뭇 진중했다.
근처에 있는 충렬사와 천곡기념관에도 들렀다.
1592년 4월 15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같은 날 오후 동래읍성으로 진격했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 하는 왜군의 말에 동래부사 송상현이 받아친 말은 유명하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달려드는 왜병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부산에서 사망한 그의 묘가 어떻게 청주에 오게 됐는지 문화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중앙공원을 찾아 임진왜란 시 청주읍성 탈환에 관한 해설을 들었다.
공원에는 승병 영규대사, 중봉 조헌 장군, 박춘무 의병장의 업적이 여러 개의 비석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답사를 마치고 서문동 삼겹살 거리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아쉬운 생각이 또 들었다.
이순신 장군이 생전에 한 번이라도 청주에 왔었다면 그럴듯한 역사 이야기가 남았을 텐데.
집으로 돌아와 9시 뉴스를 보는데 귀가 번쩍 띄었다.
올해 이순신 탄신 480주년을 맞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한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2026년 3월 3일까지 친필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 등 국보 6건과 보물 39건을 포함해 258건을 선보인다.
꼭 가보리라 마음먹고 하루를 정리했다.
이튿날, 휴일 아침 운동으로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었다.
바닥만 내려보고 트랙을 몇 바퀴 돌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앗! 화단 중앙에 떡 하니 큰 칼 옆에 찬 이순신 장군이 있는 게 아닌가.
청주에서 이순신 찾기는 이렇게 뜬금없이 이루어졌다.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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