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모호성은 이 심리전의 전위 부대다. 미 연준(Fed)은 한국을 ‘준핵심국’에 묶어두고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여부를 확정 짓지 않은 채 모호하게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에 거액의 투자를 해야 하는 한국이 언제든 외환위기의 벼랑 끝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공포를 유지해 우리의 외교적 자율성을 제약하는 ‘신용의 목줄’이다. 1997년의 국가 외환위기에서 미국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지원을 받은 우리로서는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영역이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에 따라 15%에서 25%를 오르내리는 유동적 관세율과 끊임없는 재협상 사이클로 대변되는 통상의 모호성이 더해진다. 미국은 무엇이 불만인지, 정확한 입장을 우리에게 전달하지 않고, 이런저런 불평만 늘어놓으며 한국을 애태운다. 갑자기 종교단체 지도자의 사법처리 문제를 제기한다든지, 쿠팡에 대한 불이익을 통상 문제로 비화시키는 미국 고위 관계자들은 분별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이러는 동안 정부와 기업은 고장 난 계산기를 두드리며 불확실한 미래의 높은 위험을 추산한다. 작년 조지아주 한국인 기술자 구금 사태를 겪고도 미국은 우리에게 비자 정책을 개선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여전히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가장 뼈아픈 지점은 전략적 모호성과 핵우산의 모호성이다.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설을 일방적으로 유포해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불안을 자극한다. 박정희 대통령 이래 지난 50여년간 주한미군 문제는 “미국이 우리를 버릴지 모른다”는 방기(Abandonment)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유령이었다. 필자는 트럼프 2기 정권이 들어선 이래 “주한미군 감축”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된 언론 보도를 접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 이런 보도가 너무 범람하자 이제 국민 정서는 미군이 감축된다 해도 별로 충격이 아니며, 굳이 말릴 생각도 없다.
핵우산과 확장억제력에 대한 미국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선언은 동맹의 안전을 담보로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는 ‘안보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미국은 지금 우리나라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나 원자력 연료 주기를 자주화하는 문제도 확답을 미루고 있다. 지난해 미 백악관이 발표한 팩트시트에서도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과 핵재처리를 “지지한다”고 했지, 문제의 핵심인 원자력협정을 “개정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역시 알맹이가 없는 모호성 전략이다. 이런 전략은 미국에 순치된 한국 엘리트들에게 “미국이 우리를 싫어하거나 오해하지 않을까”라는 강박적 패배주의를 심어주었다.
미국은 우리에게 수천억달러의 대미 투자와 비관세장벽 철폐를 요구하면서도, 동맹을 강화하고 한국의 이익을 존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배려도 하지 않는다. 한·미 간의 산적한 문제 해결에도 관심이 없는 미국 정부는 대미 투자 외에는 우리가 뭔 이야기를 한들 듣지 않을 것이다.
이런 미국에 휘둘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 “미국 없는 한국”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중국의 세력권에 흡수된다”는 자해적인 망상도 꿈틀댄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지 모른다는 “제2의 애치슨 라인”에 대한 공포가 야당 유력 인사의 입에서 나왔다.
미국이 강요하는 심리적 공황을 극복하고 나면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한 쪽은 미국이라는 실상이 드러나는데도 말이다. 지지율이 폭락하자 한국에 대한 권력 행사에 조급한 트럼프다. 미국이 사라지면 우리가 힘과 실력을 키워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해야 한다. 강인한 생존 의지를 다지며 혁신하고 자강을 도모하는 중견국 전략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런 비전과 포부 없이 현재 국제질서에서 연명이나 하려는 엘리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 |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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