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언론 “트럼프 이후 백악관 입성 노리는 야심가”
미국 루비오 국무장관이 14일(현지시각) 독일 뮌헨의 ‘바이에리셔 호프’ 호텔에서 열린 제62회 뮌헨 안보 회의(MSC)에서 연설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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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14일 독일 뮌헨안보회의 연설에서 유럽과 미국의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며 “유럽은 미국의 소중한 동맹이자 오랜 친구이며, 미국은 언제나 유럽의 자식일 것”이라고 했다. 루비오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그려진 로마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과 독일 쾰른 대성당의 웅장한 첨탑을 언급하거나, 모차르트·셰익스피어·단테·비틀즈·롤링 스톤즈 등 서구 문명의 아이콘을 학문적인 어조로 아우르는 연설로 문화 자긍심이 강한 유럽 청중의 이목을 단번에 끌었다.
쿠바 이민 가정 출신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JD 밴스 부통령에 비해 비교적 온건하다는 평가를 받는 루비오는 이날 연설 후 유럽 참석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악화일로를 걷던 대서양 동맹의 외연만큼은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 외교전문지 ‘르그랑콩티넝’은 이날 루비오의 연설을 두고 “미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를 넘어선 미래를 보는 듯하다”며 “미 국무장관이라기보다는 트럼프 이후 백악관 입성을 노리는 야심가의 목소리가 더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모차르트·셰익스피어·단테까지... ‘유럽풍 레토릭’ 총동원
실제 루비오의 연설 전문을 보면 ‘미국 우선주의’ 또는 ‘유럽의 자력 방위’를 강조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총론과 크게 어긋나는 대목은 없었다. 루비오는 “서방은 대규모 이민과 산업 쇠퇴라는 두 가지 재앙에 시달리고 있다”며 “위기에 처한 서구 문명이 자긍심을 되찾으려면 반드시 이 두 가지 대앙과 싸워야 한다”고 했다. 또 “국경 없는 세상은 우리 사회의 결속을 위협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이 서구 문명의 쇠퇴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고, 이 싸움을 미국 혼자서 싸울 수 있지만 여러분(유럽)과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루비오는 또 유럽과 미국이 한때 ‘세계보편주의’의 환상에 빠졌다고 지적하며 “국경 없는 세상에서 모두가 세계 시민으로서 살게 될 것이라는 착각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며 “인간 본성과 5000년 넘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발상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환상 속에서 우리는 무제한 자유 무역이라는 독단적 비전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한 루비오는 유럽을 겨냥해 “그 와중에도 일부 국가는 자국 경제를 보호하려 자국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 우리의 경제를 약화시키고 사회 곳곳의 산업화를 파괴하며 핵심 공급망의 통제권을 적대국과 경쟁국에 넘겨줬다”고 했다.
◇유럽 겨냥해 ‘환상 빠졌다’ 기존 美입장은 동일
루비오는 역시 유럽을 가리켜 “주권을 점점 더 국제기구에 위임했고 많은 국가는 자위 능력을 희생하면서까지 막대한 복지 국가 건설에 투자해왔다”며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재무장을 진행하고 있으며, 자국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무력 사용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유럽이 ‘세계보편주의’라는 이상에 도취된 유럽이 현실을 외면한 탓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자초했다고 해석되는 대목이다. 프랑스 르몽드는 “유럽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입장인 루비오가 유럽에 내리는 평가는 트럼프와 밴스와 동일하다”고 했다.
다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고압적인 ‘훈계’로 일관했던 트럼프나 밴스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루비오는 “미국과 유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미국은 250년 전 건국됐지만 그 뿌리는 유럽 대륙에 더 깊이 박혀 있다.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조상들의 기억, 전통,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품고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고 했다. 이어 “이는 신성한 유산이자 구세계와 신세계를 잇는 끊을 수 없는 유대”라고 했다.
◇“트럼프, 유럽을 걱정해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루비오는 트럼프가 유럽에 보이는 거친 태도를 변호하는 발언도 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은 가장 깊은 유대로 묶여 있기 때문에 우리 미국인들의 조언이 다소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보일 수 있다”며 “우리는 유럽의 미래를 미국의 미래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며, 때때로 의견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은 유럽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강한 유럽을 원한다”며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미래를 확신하며, 경제적·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위대한 문명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럽 언론은 루비오가 “자유의 씨앗을 뿌리고 세상을 바꾼 사상들이 탄생한 곳이 유럽이다. 법치주의, 대학, 과학 혁명이 탄생한 곳도 바로 유럽”이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트럼프 행정부와의 기조와는 다르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버드 등 대학들과 ‘문화 전쟁’을 벌이며 교육 보조금을 끊거나, 법치주의를 무시한 채 폭압적 이민자 탄압 정책을 펴는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장관 발언으로서는 이례적이었다는 평가다. 르그랑콩티넝은 “잔혹하고 비대칭적인 일방주의를 보여주는 트럼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며 “루비오의 담론은 케네디를 연상시킬 정도”라고 했다.
◇트럼프 언급 네 차례 그쳐... 차기 주자 존재감 드러내
유럽 청중은 루비오의 연설이 끝난 뒤 ‘기립 박수’를 보냈다. 볼프강 이싱거 뮌헨안보회의 의장은 루비오 연설이 끝난 뒤 질의·응답에서 “이 자리에 울려퍼진 안도의 한숨을 들었느냐”며 “대서양 동맹에 대한 안심의 메시지를 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만 유럽에선 이날 루비오의 연설이 트럼프의 ‘순한 맛’ 버전에 불과할 뿐 본질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시각이 여전하다. 유럽에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현 트럼프 정부가 국내 정치적으로도 지지율 하락을 겪는 만큼, 루비오가 유럽 내 반미 감정을 달래기 위해 일종의 ‘굿캅’으로서 외교적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루비오가 연설에서 트럼프를 불과 네 차례밖에 언급하지 않은 것을 두고, 현직 대통령인 트럼프와 일종의 ‘차별화’를 시도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루비오가 미 공화당의 차기 주자로서 기존의 거칠고 투박한 MAGA 담론에 기존 전통 공화당 지지층까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세련된 논리를 첨가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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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원선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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