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시민총궐기대회가 열린 11일 저녁 시민들이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일대에서 명동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2·3 내란사태는 20세기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시민사회가 지키려고 했던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계엄을 정당화하는 대통령,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과 폭력적인 공격은 위기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러나 광장의 넘실대던 응원봉이 일깨우듯 민주주의의 회복을 말하는 움직임이 있다.
미얀마·시리아 출신 난민·활동가 등
흔들리고 번민하는 사람들이 일군
세계 민주주의 역사 담은 책 출간
“인터넷에 방치된 10대에 말 거는 책”
20일 책 ‘10대가 꼭 알아야 할 세계의 민주주의’(이은북)를 출간한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다시 민주주의를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탄핵 집회 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은 평소의 즐거웠던 삶을 시위 장소에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위기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세계의 다양한 사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정치철학자이자 문화학자인 이진 소장은 2004년부터 독일에서 문화학 박사과정을 밟은 뒤 베를린에 정착해 정치·기억 문화 등에 대해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독일 정치+문화 연구소의 이진 소장. 이진 소장 제공 |
이진 소장은 지난 3년여간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미얀마, 몽골의 난민과 민주화운동 활동가 등을 만나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군사독재의 상징인 용산 남영동 옛 대공분실 자리에 올여름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개관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지원해 출간됐다. 이 소장은 “난민이나 소수자에 대한 10대의 의견을 묻기는커녕, 이(들의 이야기)를 인터넷 공간에만 방치해 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청소년에게 말 거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키울 10대를 위해 쓰였지만, 평범한 이웃들의 목소리가 담긴 책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한겨레는 지난 17일 베를린에서 이 소장을 만나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들었다. 책에 담긴 삽화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던 홍지흔 작가가 그렸다.
이진(왼쪽 셋째)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이 미얀마 청년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민주 독립 언론 미얀마 언론사진협회(MPA)의 편집장과 기자들을 만났다. 이진 소장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진 소장이 만난 인물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대가 없이 거처를 내어주던 독일 시민과 고국의 군부독재 현실을 알리려 독립 언론을 꾸려가는 미얀마 청년들의 이야기가 손짓을 한다. 독일에서 난민 정착을 지원하는 시리아 출신의 앗시아는 민주주의를 위한 거창한 법이나 제도부터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갑작스러운 전쟁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을 환대하고, 무관심한 세계에 목숨 걸고 군부와 싸우는 현실을 알린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행동을 하고 있다. 5년 전 목숨을 걸고 시리아에서 독일로 탈출해 난민 인정을 받았던 앗시아는 14년여 만에 시리아 내전이 종식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모두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며 “시리아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가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제도가 있어도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느끼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민주화가 계속되던 시절 10대를 보낸 미얀마 청년들이 기자가 됐고, 난민 캠프에선 난민 스스로 대학을 만들어 청년을 가르쳤다. 이런 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독일로 피난 온 마샤 가족이 향한 테겔 공항의 집단 숙소 시설 모습. 낯선 사람들과 한 곳에서 생활하게 된 마샤 가족은 집단생활을 하며 큰 괴로움과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이진 소장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책은 자칫 “불편”하게 느껴질 질문도 건넨다. 2021년 2월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미얀마는 4년 동안 유혈사태와 혼란을 겪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관심은 미미하다. 반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언론은 시시각각 전황과 피해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책은 이런 관심의 차이가 왜 발생하는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하는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인권이 그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보여준다고도 말한다.
독일서 20년간 정치·기억문화 연구
베를린서 우크라이나 피난민 목격
“누구나 난민될 수 있는 현실 경험”
한국 사회에선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난민을 중심에 두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직후, 한국의 서울역과도 같은 베를린 중앙역으로 피난을 온 우크라이나 시민들을 목격한 이 소장은 “누구나 난민이 될 수 있는” 현실을 경험했다. 한순간 난민 신세가 되어 겪는 인간적 충격에 더해 박탈된 교육 기회 등은 모두가 누려야 할 인권을 빼앗기는 것이기도 했다. 이 소장은 “인권과 민주주의는 서로 맞닿아 있다. 난민이나 소수자가 배제되는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고 연대하는 모습 또한 봤다. 쉽게 체념하기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얀마 맬라 난민 캠프 공터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아이들. 난민 캠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바깥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진 소장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견고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과거의 상처를 바로잡는 “기억”이다. 10여년 전부터 독일 분단기 동독을 탈출한 주민들과 시리아 난민을 만났던 이 소장이 책에 담으려 한 것도 부러워할 만한 해외 사례가 아닌, “흔들리고 번민하는 사람들이 일구어낸 민주주의의 역사”였다. 그는 “기억 문화는 과거 청산의 도구 이상의 가능성을 갖는다. 이념이나 생각이 다르다 해도, 논리와 정서적 감정이 모두 섞인 기억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타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소통의 공간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20일 출간한 책 ‘10대가 알아야 할 세계의 민주주의’ 표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베를린/장예지 특파원
penj@hani.co.kr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