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 롱런 흥행하는 작품들 잇따라
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30주년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프레스콜 공연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된 명성황후(김소현)가 혼백이 되어 백성과 함께 마지막 노래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부르는 장면. 가사는 ‘망국의 수치 목숨 걸고 맞서야 하리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로 이어진다. 이 작품 이후 ‘애국심 코드’는 많은 대극장 뮤지컬의 관객 감동과 흥행 요소가 됐다.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뗏목을 타고라도 가겠다고 밀어붙여 뉴욕 링컨센터 무대에 올랐죠. 뮤지컬 ‘명성황후’는 제게 효녀 같은 작품이었지만 크는 동안 말썽 한번 안 피우는 그런 효녀는 아니었습니다. IMF 외환 위기는 링컨센터에서 겪고, SARS(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는 LA 코닥 극장에서 맞았고, 코로나가 창궐할 때는 예술의전당이었습니다.”
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뮤지컬 ‘명성황후’ 30주년 리셉션. 제작사 에이콤 윤호진(77) 예술감독은 “공연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아 죽음을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작품을 일으켜 세운 건 관객이었다”고 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날, 굴곡진 구한말 역사처럼 소용돌이치며 회전하는 원형 무대 위로 달려나오는 궁녀들이 차례로 일본 낭인들의 칼에 쓰러지는 시퀀스는 창작뮤지컬 '명성황후'가 30주년을 맞은 지금도 여전히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명장면이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프레스콜 공연. /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우여곡절 많았던 지난 30년 여정을 견디게 해준 것은 오직 ‘꿈’이었습니다. 뮤지컬 시작할 때부터 제 꿈은 우리 작품을 들고 세계에 진출해 인정받는 것이었지요. 요즘도 가끔 젊은 후배들에게 잔소리처럼 말합니다. ‘꿈을 꿔라. 그것도 원대하게. 꿈꾸는 데 돈 드는 거 아니잖은가. 대신 꿈만 꾸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100주기를 맞은 1995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을 올린 이 뮤지컬은 한국 창작 뮤지컬이 대극장 무대에서 경쟁력을 증명한 효시와 같은 작품. 국내 누적 관객은 200만명을 넘어, 3일 기준 219만7444명이 됐다고 제작사는 밝혔다. 여기에 더해 미국, 영국, 캐나다 등 해외 관객도 18만명에 달한다. 윤호진 감독과 ‘명성황후’가 걸어온 길은 아무것도 없던 무(無)에서 지금 세계의 각광을 받는 ‘K뮤지컬’을 일으켜 세운 역사다. 초연 2년 만인 1997년 한국 뮤지컬 사상 처음으로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했으니, 지금 꾸준히 이어지는 브로드웨이 진출의 문을 연 격이다.
원작소설 '여우사냥' 이문열 작가, 윤호진 에이콤 예술감독, 초창기 명성황후 주역 배우 이태원 명지대 교수(왼쪽부터)가 4일 세종문화회관 뮤지컬 명성황후 리셉션에 나란히 앉아 있다. /에이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날 리셉션에 참석한 이문열(77) 작가는 원작 소설 ‘여우사냥’을 썼다. 그는 “제가 쓸라다가 쓴 기 아이고, 윤호진 대표한테 하도 졸리다가, 2년 가까이 졸리다가 쓴 긴데…”라며 웃었다. 약 17년간 이 뮤지컬의 주역을 맡았던 이태원(59) 명지대 교수가 “윤 대표님이 뗏목 타고 미국 오셨던 그때부터 함께했었다”고 인사하자 폭소가 터졌다. 이 교수는 줄리아드 스쿨 음대를 나와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다 1997년 ‘명성황후’의 뉴욕 공연부터 주역으로 합류했었다. 이날 이문열 작가와 김희갑(89) 작곡가, 양인자(80) 작사가 부부, 무대미술가 박동우(63) 홍익대 교수와 함께 감사패를 받았다.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의 김희갑 작곡가, 양인자 작사가 부부가 공연 3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에이콤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날 리셉션에 참석한 하객들은 각자 윤호진 대표와의 추억담을 풀어놓았다.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윤 대표와 함께 연극을 공부했던 배우·공연 기획자 송승환(68)은 “호진이 형 부인이 뉴욕에 작은 손톱 미용실을 차릴 때 호진이 형과 같이 가게 페인트칠을 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김치찌개를 해준다더니 밥솥을 안 가져오신 거예요. 뉴욕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돼지고기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인데. 호진 형이 근처에서 식빵을 사 와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샌드위치로 먹었어요. 지금까지 제 평생 먹어본 최고의 김치찌개였습니다.” 송승환은 “뮤지컬 ‘명성황후’를 완성시킨 윤호진의 창의력은 그때 눈을 뜬 게 아닌가 한다”며 웃었다.
‘명성황후’ 외에도 지금 극장에는 20~30주년을 맞은 뮤지컬들이 있다. 30주년 ‘명성황후’는 마지막 넘버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부를 때 여전히 많은 관객이 눈물을 흘린다. 한 맺힌 역사를 배경으로 ‘애국 코드’를 건드리는 뮤지컬의 원조 격인 셈. 올해 20주년을 맞은 ‘지킬 앤 하이드’는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흥행하지 못한 작품이었지만 무대 위 스타로 발돋움하던 조승우와 서울대 음대 출신 성악가 배우 류정한 등 배우의 힘으로 국내에서 크게 흥행했다. 주역 배우가 거의 원맨쇼처럼 가창력을 폭발시키고 초인적 연기력을 선보이는 대극장 뮤지컬 흥행 코드가 이 작품으로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5주년 뮤지컬 ‘베르테르’는 인터넷 보급과 맞물려 최초의 작품 팬덤을 형성한 뮤지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창작자들의 졸업 작품으로 시작해 20주년을 맞은 뮤지컬 ‘빨래’는 6300회 이상 공연되며 130만 명 넘는 관객을 모았다.
[이태훈 기자]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