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정재훈의 먹다가 궁금할 때] (6)
갈비·전·나물 등 명절 식탁에 오르는 음식은 매운 게 많지 않다. 옛사람들은 매운맛보다 담백함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명절 음식 중에는 칼로리가 높은 게 많다. 칼로리는 넉넉함의 상징이었다/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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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음식엔 왜 매운 게 드물까. 설명은 많다. 붉은색이 귀신을 쫓는데 조상 혼령까지 못 오게 하기 때문이란 속설이 있다. 그런데 붉은 대추나 사과가 차례상에 올라가는 걸 보면, 그 한 줄로 끝나진 않는다. “향이 강하면 안 된다”, “오신채(파·마늘·달래·부추·흥거)가 수행을 방해한다며 기피하는 불교 문화의 영향”이라는 말도 따라오지만 이것도 딱 떨어지진 않는다. 나물에 마늘을 쓰는 집도 많고, 오신채에 고추는 애초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추가 한반도에 늦게 퍼졌다는 이야기 역시 자주 인용된다. 고추가 조선에 전래된 시점을 16~17세기 무렵으로 보더라도, 한국 음식이 지금처럼 고추 중심으로 맵게 재편되는 과정은 처음엔 점진적이다가 19세기에 가속화됐다는 것이다.
다 가능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음식의 가치 면에서 보면 답이 달라진다. 과거 오랫동안 사람들은 매운맛보다 담백함을 더 귀하게 여겼다. 명절 음식은 음식에 대한 가치관을 보관하는 저장고다. 평소엔 자극을 즐기면서도, 정작 큰 날이 되면 담백한 맛으로 돌아가는 건 우연이 아니다. 담백함은 오래도록 ‘품위 있는 맛’이었다.
◇명절 음식은 왜 고칼로리일까
여기서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매년 이맘때면 “명절 음식이 칼로리가 높다”는 기사가 올라온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명절·제사음식 영양성분 자료집’ 기준으로 떡국 한 그릇(800g)은 711kcal, 소갈비찜 1인분(250g)은 495kcal, 깻잎전 1인분(150g)은 361kcal나 된다. 우리 조상들은 고칼로리 음식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다. 담백함이 품위였다면, 칼로리는 넉넉함의 증표였다. 지금은 설이 다가오면 열량을 걱정하는 일이 흔하다. 음식이 변한 게 아니라, 가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질문을 하나 더 해보자. 우리는 왜 명절에 떡을 먹을까. 떡은 밥보다 번거롭다. 과거에는 설날이면 집집마다 멥쌀 고두밥을 짓고, 떡판 위에 쏟아 떡메로 수없이 내리쳐서 흰떡을 만들었다. 그렇게 쫀득해진 흰떡을 길게 빚어 가래떡으로 만들었다. 사람 손길이 많이 가는 음식은 대개 사치다. 쓸데없는 사치란 뜻이 아니라, 그만큼 공(功)과 시간이 들어갔다는 뜻이다.
칼로리의 관점에서도 떡은 밥보다 에너지 밀도가 높은 음식이다. 같은 쌀이라도 떡은 물을 더 밀어내고, 더 단단하게 압축된 형태로 식탁에 올라온다. 가래떡 100g의 열량은 208kcal로 밥(146kcal)보다 40% 이상 높다. 명절에 떡을 먹는 건, 단지 전통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고칼로리 음식을 높이 평가한 감각의 연장선이다.
◇9첩 반상이 도시락 한 칸으로
요즘 명절 음식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 가치가 바뀌면 상차림도 바뀐다. 명절상은 간소해지고 있다. 예전엔 떡국이 설날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이제 떡국은 명절의 상징이 아니라 탄수화물의 상징처럼 여겨지며 조금씩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그 빈자리를 파고든 건 편의점이다. CU가 집계한 최근 3년 명절 연휴 도시락 매출은 해마다 두 자릿수로 뛰었다. 명절 연휴 간편식 단품 매출 1위도 도시락이었고, 대학가·오피스가·산업지대처럼 1인 생활권에서 특히 판매가 더 늘었다. 올해 설을 앞두고 이마트24가 내놓은 ‘혼설만찬 K-명절 풀옵션 한판’이라는 도시락은 이름부터 지향점이 분명하다. 차례를 지내지 않더라도 명절의 냄새는 맡고 싶은 사람을 겨냥해 전·당근잡채·너비아니·불고기·나물·볶음김치 같은 것들을 한 판에 모아놨다. 명절 한 상이 집집마다 솥과 떡메에서 나오던 시대에서, 이제는 냉장 진열대에서 꺼내는 한 끼로도 재현되는 것이다.
이게 단순한 기획 상품이 아니라는 건 숫자가 말해준다. 농촌진흥청이 소비자 패널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올해 설에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는 응답이 63.9%에 달했다. 1년 전보다 12.4%포인트 늘었다. ‘준비가 번거롭다’는 이유도 적지 않았다. 차례상이 가벼워지는 만큼, 명절의 상징도 작아진다. 9첩 반상은 이제 큰 상 위에 펼치는 풍경이 아니라, 도시락 한 칸에 압축돼 존재감을 뽐낸다. 상의 크기도 줄고,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었다.
떡국을 ‘탄수화물 폭탄’으로 보는 시선을 과민반응이라 치부하긴 어렵다. 연구들에서 연말연시 휴일 동안 체중 증가는 평균 0.4㎏ 수준이지만, 이런 작은 증가는 휴일이 끝난 뒤에도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누적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떡국은 국물만 조금 먹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떡국 떡을 바꾸기도 한다. 실제로 현미 떡, 곤약 떡 같은 대체재가 늘어나고 있다.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 아예 경험을 강화하는 쪽으로도 변화가 보인다. 전이 명절 반찬에서 코스 요리로 재해석되고, 송편은 꽃 모양이 된다. 명절 음식이 SNS를 만나면서 맛뿐 아니라 연출과 서사가 가치가 된다. 한쪽에서는 단순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더 정교해진다. 둘은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흐름이다. 명절을 ‘나만의 선택’으로 만들려는 욕망의 결과다.
◇형식은 바뀌어도 온기는 그대로
변화를 이끄는 쪽이 요즘 세대만은 아니다. 한 상 가득 차려야 마음이 놓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이 정도면 됐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지난 2024년 설을 앞두고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최영갑 위원장이 실제로 차릴 차례상 예시를 그림으로 공개했는데, 떡국 한 그릇에 나물·고기구이·김치 한 접시씩, 과일은 사과·배·감에 샤인머스캣까지였다. 술과 과일을 제외하면 직접 만든 음식은 네 가지뿐이고 심지어 매운 양념의 김치가 올라간다. ‘큰 날엔 담백하게’라는 오래된 예법은 남아 있는데, 동시에 김치라는 일상 음식도 같이 상에 올라온다. 차례를 제사처럼 무겁게 만들지 말고, 가족이 편하게 모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형식은 시대에 맞게 바꿔도 된다. 전을 부치든 사오든, 과일이 사과든 샤인머스캣이든, 떡국을 다 먹든 국물만 먹든, 다 괜찮다.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관계다. 명절 음식의 제일 중요한 가치는 함께 먹는 식사에 있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같은 식탁에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독이는 일이 명절의 핵심이다. 형태가 편의점 도시락으로 바뀌든, 떡이 곤약으로 바뀌든, 그 본질만큼은 변함없이 남길 바란다.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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