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이옥진 기자의 진심]
100년 이어온 명창家
홍성덕·김금미·박지현
판소리 명고(名鼓)였던 홍두환은 다섯 살 난 딸을 모질게 막아섰다. “니 또 소리 할 거냐”며 딸에게 회초리를 드는 남편을 당대의 명창이었던 김옥진이 울부짖으며 말렸다. “여보, 차라리 나를 때리쇼. 부모가 잘못이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디 지도 어쩔 것이요….” 소녀는 날 때부터 소리가 좋았다. 갓난아기가 요란한 농악 소리에 생글생글 웃었다. 매질하고, 광에 가두고, 구슬려도 봤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귀동냥으로 가락을 훔치던 소녀는 결국 소릿길에 들어섰고, 긴 세월이 흘러 국악계의 대모가 됐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명창 홍성덕(81)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 얘기다.
날 때부터 정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홍성덕 가문을 보면 ‘숙명’이란 게 있는 것만 같다. 그는 기어이 소릿길을 걸었고, 딸 김금미(61·전 국립창극단 악장)와 외손녀 박지현(23·서울대 국악과 재학)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외증조할머니부터 시작된 소릿길이 모계로 4대째, 100년의 세월을 견디며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다.
1년여 전, 삼대(三代) 소리꾼은 한 무대에 섰다. 여성국극을 다룬 드라마 ‘정년이’가 화제를 모으자, 국가유산진흥원이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이 된 그녀들’을 기획한 덕분이었다. 홍성덕은 원로 배우들과 함께 ‘춘향전’을, 김금미와 박지현은 ‘선화공주’를 선보였다. 한 번의 이벤트로 기획된 무대에 관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빗발치는 요청에 공연은 연장됐고, 3회 공연 모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설을 앞두고 이들을 만났다. 여든을 넘긴 홍성덕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 옛이야기에 서글서글 웃다가도 지난 세월의 고비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소리를 청하자 망설임 없이 ‘춘향전’의 한 대목을 뽑았다.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잠깐의 흥얼거림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딸과 외손녀는 노(老)명창을 살뜰히 챙겼다.
◇여성국극에 몸바치다
“여성국극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 매력 있어요. 가슴이 벅차고 소름이 쫙쫙 돋는 건 말로 다 못 하는 거지요.”
여성국극은 1950~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국악 연극이다. 소리 중심인 창극과 달리 노래·연기·춤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로,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가 맡는다. 열여섯에 임춘앵여성국극단의 무대를 보고 여성국극에 빠진 홍성덕은 1960년대 ‘선화공주’ ‘무영탑’ ‘춘향전’ 등의 주인공 역할을 맡으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55년 5월 10일 본지에 실린 여성국극 광고.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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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가 대단했다고요.
“말로 못할 정도였죠. 그때 국극 이상 가는 게 없었으니까. 남자 주인공 역 팬 중엔 시집도 안 가고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았어요. 공연장은 항상 빈자리 없이 가득 찼지요. 공연이 열리는 극장이나 공회당 앞은 사람이 너무 많아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어요.”
-왜 사라졌나요.
“TV가 나오고 영화 문화가 발달하면서 점점…. 공연 한 번 하려면 제작비가 엄청 드는데, 사재를 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유지가 어려웠죠.”
-1987년에 서라벌국악예술단을 만드셨죠?
“아무리 생각해도, 여성국극만큼 매력적인 게 없어서 한때의 옛이야기로 잊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죠. 살려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뛰어들었어요.”
그가 창단한 서라벌국악예술단의 출발은 화려했다. 국립극장 대극장에 올린 창단 공연 ‘성자 이차돈’은 전석 매진됐다. 그러나 이어진 지방 공연은 참담했다. 대구에서 4회 공연했는데, 관객은 50명도 안 됐다. 출연료를 못 받은 단원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했다. 끼고 있던 반지와 목걸이를 팔아 겨우 서울로 돌아왔고, 당시 살던 아파트를 팔아 빚을 갚았다.
-그래도 포기를 안 하셨군요.
“소리꾼이면 관객이 한 사람이라도 오면 공연을 해야지요. 빚 갚은 다음 날부터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어요. ‘성자 이차돈’을 88올림픽 축하 공연으로 올리자고 마음먹고 올림픽 준비위원회를 찾아갔지요. 우리 고유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려야 한다, 죽어 가는 나무에 물을 줘 살리듯 정부가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결국 올림픽 마크를 달고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6회 공연했고, 앙코르도 했습니다.”
-그 뒤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항상 쪼들리고, 허덕이고, 사람들 만나 아쉬운 소리 해야 하고…. 그래도, 좋으니까. 남한테는 없는 멋이 여성국극에 다 있으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매년 한 차례는 작품을 했습니다.”
-여성국극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안 본 사람한테는 말해 줘도 몰라요. 감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된다고 해야 하나. 배우들이 껴안거나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남녀 배우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한 감정이 살아나요. 볼수록 매력이 깊어지는 예술이지요. 중국 월극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은 상업화돼 이어지잖아요. 우리 여성국극의 수준이 훨씬 높은데도 인정을 못 받아 한스럽습니다.” (여성국극은 2018년 국가무형유산에 도전했지만 지정되지 못했다.)
홍성덕 명창이 여성국극 무대에 오른 모습.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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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 소리꾼의 운명
-아버지 반대에도 소리를 하셨습니다.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어요. 멍석으로 둘둘 말아서 매질하신 적도 있지요. 무남독녀 외동딸이 그 힘든 소릿길을 간다고 하니, 고생시키기 싫으셨겠죠. 너무 잘 아시니까…. 그 어렸을 때도 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어머니가 방에서 소리 하면 창호지에 구멍 뚫어서 몰래 보고 따라 하곤 했지요.”
-데뷔는 일곱 살 때라고요.
“부모님이 이끌던 창극단이 ‘흥부와 놀부’를 공연할 때였어요. 흥부 막내아들 돌남이 역을 맡은 아이가 집에 가버렸어요. 내가 ‘엄니, 내가 돌남이 하면 안 돼요?’ 했어요. 단원이었던 임방울 선생님이 ‘공연은 해야 쓰겄으니, 딱 이번 한 번만 성덕이 시켜봅시다’라고 하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그냥 나가버리셨고요. 무대를 마치고 오니까 단원들이 나를 안아주며 ‘오메메, 언제 소리를 익혔다니’ ‘시상에,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대’ 하며 우시더라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소리의 피’를 누구보다 잘 알던 어머니는 열 살 딸의 손을 잡고 박봉술 명창을 찾아갔다. 어머니의 곁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그게 겁나면 어떻게 명창이 되겠느냐”고 일갈했다. 선생님에게 예쁨 받고 싶어, 밥 먹는 시간만 빼곤 소리에 매달렸다. 산에 올라 달을 보고 몇 시간이고 노래했다.
-어린 나이에, 힘들지 않으셨나요.
“힘들다고 생각했으면 못 했겠죠. 내가 소리를 한다는 게 황홀했지. ‘명창이 돼야지’란 생각뿐이었어요.”
그는 박봉술을 시작으로 강도근·홍정택·오정숙·김소희 등 이름난 명창을 두루 사사했다. 1977년 상경해 여성국극에 매진하다 다시 판소리로 돌아왔고, 1981년 남원 전국국악명창대회 판소리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이후 여성국극 부활 운동에 앞장섰고, 2012년부터 8년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한국 국악계를 이끌었다.
1996년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여성국극 '황진이' 무대. /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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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공연도 많이 하셨죠.
“100번도 넘지요. 1996년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한 ‘황진이’ 공연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직접 찾아가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성사된 공연이었거든요. 펑펑 울었지요. 해외에서 공연을 하면 반응이 정말 뜨거워요. ‘한국에 이런 게 있는 줄 몰랐다’ ‘한국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냐’고들 해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니 서글프지요.”
그는 “요즘 K콘텐츠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뿌리는 우리 전통에 있다”고 했다. “남의 것 흉내 내지 않고, 우리 오리지널을 지키는 것이 가장 강력한 경쟁력입니다. 전통은 모든 새로운 것의 출발점이자, 미래이지요.”
소리꾼에겐 한(恨)이 많아야 한다고 했던가. 홍성덕의 인생 굽이굽이에는 유독 모진 바람이 잦았다. 삼십대에 남편과 헤어지면서 삼남매와 생이별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과 다시 살게 됐지만 예순여섯에 막내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어떤 인생이었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힘들었지만, 그저 열심히 산 인생”이라고 했다. 소리를 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후회 없어요. 남이 못 하는 일을 했거든. 배고프고 아픈 감정들이 다 내 소리로 나오는 거예요.”
-딸(김금미)에게 소릿길을 권유하셨다고요.
“딱 보면 알거든. 서너 살 먹으니까 소리를 막 내뱉더라고요. 뱃속에서 들었나 봐요. 내가 ‘니는 우리 전통문화를 지키라고 타고났다’ 했어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소리꾼입니다.”
◇미웠던 엄마를 닮다
김금미는 어린 시절 절대 소리판에 뛰어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공연을 마치고 녹초가 돼 돌아온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소리 귀신 씐 집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예술입네 하고 돈 한 푼 못 버는 소리꾼의 삶이 싫었다. 하지만 결국 스물다섯에 소리를 시작했다. 199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고, 2007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결국 소리꾼이 됐네요.
“노래를 하는 즐거움이 늘 있었어요. 스무 살쯤이었나, 어머니께서 거실에서 ‘농부가 한번 해볼래?’ 하고 노래를 시키시더라고요. 제가 흉내를 내니, ‘너 허겄다’ 그러셨어요. 무용을 해서 20대 때 국극 무대에 서곤 했지만, 아무래도 소리가 약했지요. 어머니께서 ‘길게 갈 것은 소리다. 소리를 해야 헌다’ 하셨어요. 그때부터 소리를 시작했죠.”
-늦은 시작, 어렵지 않았나요.
“가르쳐주시는 걸 습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성음(聲音), 목 훈련이 힘들었지요. 집에서 연습할 때 문이란 문은 다 닫고 소리를 질렀어요. 혈압이 오르고, 핏줄이 터져 나갈 것 같고, 기운이 빠져 쓰러지고…. 그런 세월을 10년 정도 보낸 것 같아요.”
지난해까지 국립창극단을 이끄는 창악부 악장을 맡았던 그는 ‘믿고 보는 배우’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피를 토하며 노래하는 패전국 왕비를 맡아 호평을 받았다. 재작년엔 3시간 30분 길이의 적벽가 완창(完唱)에 성공했다.
-소리꾼에게 완창은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살아있다는 증명이죠. 올 5월에 적벽가 완창 공연을 한 번 더 올리려고 해요.” (김금미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를 완창했다.)
-작년에 국립창극단에서 정년퇴임했지요.
“이전엔 정해진 무대에서 정해진 역할을 소화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면, 이제는 제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시기죠. 제 감각과 정서로 무대를 채워야 하니, 더 노력해야겠지요.”
1996년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올린 '황진이' 공연을 준비할 때의 김금미 명창./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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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요.
“어머니랑 같아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에서 제가 황진이 역할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제 목소리가 예뻤던 것 같아요. 이제 그때론 돌아갈 수 없잖아요. 아이(박지현)에게도 ‘지금 네 목소리가 얼마나 큰 자산인 줄 아느냐’고 늘 말하는데, 엄마 마음을 알는지 모르겠어요. 하하.”
-어머니를 언제 이해하게 되셨나요.
“어렸을 땐 어머니가 참 미웠어요. 자식으로서 보호받고 싶은 순간에 어머니는 늘 소리를 하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저 역시 소리꾼이 돼서 아이를 낳고 보니 알겠더라고요. 여자로서, 엄마로서, 또 예술가로서 어머니가 짊어졌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어머니는 국악계 대모, 딸은 유망주입니다.
“저는 딱 샌드위치예요. 선배 국악인들이 상처받지 않는 예술인으로서 존재하도록 보필하고, 자라나는 후배 새싹들이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게 도와야죠.”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이 된 그녀들’ 여성국극 특별 공연 ‘선화공주’에서 서동 역을 맡은 어머니 김금미(왼쪽)와 선화공주 역을 맡은 딸 박지현. /국가유산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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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릿길을 잇는다는 것
박지현은 지난해 국립정동극장이 개관 30주년 기념 공연으로 초연한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에서 ‘소녀’ 역할을 맡았다. 여섯 살에 여성국극 ‘견우직녀’의 아역으로 데뷔한 그는 2021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부문(학생부) 장원, 2022년 전국 창작판소리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소리를 했네요.
“제가 소리를 택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하게 됐어요. 제 안에 소리가 있었던 건 알고 있었거든요. 열한 살 때 엄마가 성창순 명창님께 저를 데려가 테스트를 보게 했어요. ‘너는 해야 쓰겄다’ 하시더라고요.”
-친구들은 아이돌 노래를 부를 때, 판소리를 했겠군요.
“힘들고 외로울 때도 많았죠. 소리 시작하고 2~3년쯤 지났을 때, 가수가 되고 싶어 대형 기획사 문을 두드린 적도 있어요. 1차에 합격했는데 엄마가 반대하셨죠. 그땐 원망도 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 소리를 펼칠 무대가 어디인지 엄마는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선화공주’ ‘서편제’의 주인공을 맡았죠. ‘엄마 찬스’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시선이 있다는 걸 잘 알아요. 어릴 땐 정말 억울했죠. 실력으로 상을 받은 건데, 사람들은 제 배경부터 보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요. 4대째 소리를 한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죠. 궁금한 게 있을 때 엄마와 할머니께 바로 여쭤볼 수 있다는 것도 큰 행운이고요.”
-4대째 잇는다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외증조할머니부터 외할머니, 어머니까지 너무 대단하시니까요. 책임감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삼대 소리꾼의 피에 흐르는 열정은 결이 같았다. 설날 소원을 묻자 이들은 “소리를 더 잘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홍성덕(가운데) 명창은 “딸과 손녀가 하는 일이 다 잘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왼쪽은 외손녀 박지현, 오른쪽은 딸 김금미./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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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소리꾼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게 달랐다. 휴식기를 갖고 있는 박지현이 “요즘 하루에 2시간 정도 연습한다”고 하자, 홍성덕은 “너무 적다. 더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김금미는 “2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소리는 꼭 고생스럽게 배워야 하나요.
홍 “무엇이든 고생을 해야 성공하지, 편안하게 성공하는 게 어디 있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국악을 전공하다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소리가 그만큼 어려우니까. 나는 내 자식들 일부러 고생도 시켰어요. 고생을 해야만 마음에서 소리가 우러나오거든. 그 소리가 진짜예요.”
김 “저도 동의해요. 고생을 겪어본 사람의 마음, 자세는 확실히 다르거든요. 예술인으로서만 놓고 보면 제 딸을 철저하게 고생시키고 싶어요. 그래야 인내 끝에 피어나는 야생화 같은 향기, 자생력이 생기니까요. 하지만 엄마로서는 밥 한술이라도 더 떠먹이고 싶고, 춥지 말라고 핫팩이라도 쥐여주고 싶고 그렇죠. 참 어려워요.”
“K팝 등 한국 문화가 세계에서 인정받는데, 국악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는 같은 대답이 나왔다. “국악은 세계 최고의 음악”(홍성덕)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경이로운 음악”(김금미)이므로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인정받을 것”(박지현)이라는 것이다. 김금미는 “방탄소년단(BTS) 공연이 광화문 광장에서 열릴 수 있듯, 국악에도 그만한 무대가 마련되면 좋겠다”고도 했다. 꿈을 묻자 역시 비슷한 답이 나왔다. “소리꾼으로서 끝을 보고 싶다. 국민에게 좋은 걸 보여주고 싶다”(홍) “진정한 소리꾼이 되기 위해 끝없이 도전하겠다”(김) “소리꾼으로서 인간 문화재가 되고 싶다”(박)고 했다. 평생을 소리에 바친 노명창도, 그 길을 뒤따르는 딸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 외손녀도 천생 소리꾼이었다.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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