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
아베, 박근혜 당선되자 일방적 특사파견 발표
‘다케시마의 날’에 처음으로 차관급 파견도
朴, ‘친일파’ 비판 피하려 냉랭한 관계 지속
22일 다카이치 선택이 양국 정상 관계 시험대
2015년 11월 18일 필리핀 마닐라 APEC 정상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APEC 기업자문위원회(ABAC)와의 대화'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앉아 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 전 부터 아베 총리의 다케시마의 날에 첫 차관급 파견 등으로 냉랭햔 관계를 유지했다./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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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의 남녀 정상 조합은 2010년대 박근혜 대통령-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일본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 다카이치가 최소한 2028년 7월 참의원 선거까지는 총리직을 유지할 것으로 보여 이재명-다카이치 리더십이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세계사적으로 정치적 격변기에 형성되는 두 정상 관계는 양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대 박근혜-아베 관계는 왜 처음부터 어긋났는지, 왜 불신이 누적됐는지 되짚어보는 것이 이재명-다카이치 관계를 위해 필요할 듯합니다.
2012년 12월 아베의 결례
2012년 12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총리에 취임하는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오늘 중 특사를 보내겠다”고 발표했다가 취소하는 해프닝이 발생한 겁니다.
2012년 12월 21일 오전 9시 30분. 아베가 기자회견에서 “일·한 관계의 개선을 위한 생각을 담아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전 재무상을 한국에 특사로 보낸다. 내 친서도 가져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박근혜 당선인 측과 사전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일방적 발표였습니다. 박 당선인 측은 아베의 일방적 발표가 동해를 건너오자마자 즉각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아베 총재가 일방적으로 특사를 보내겠다고 발표한 것일 뿐 아무런 합의도 없었다.”
오후 2시. 일본 교도통신은 한일의원연맹 관계자를 인용, “한국(박근혜 당선인 측)과의 일정 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특사 파견이 내주 이후로 연기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오후 5시. 아베 총재는 기자 간담회에선 “특사가 자민당 차원이 아니라 한일의원연맹 차원”이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양국에서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려는 시점에 특사 파견을 발표했다가 취소한 것은 외교 관례상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새 정부 출범 전부터 한·일 관계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상징적 장면으로 기록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013년 1월 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연수원 건물에 마련된 당선인 접견실에서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특사로 방한한 누카가 후쿠시로 한일의원연맹 간사장을 접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누카가 특사에게 '무신불립'을 강조했다./조선일보 |
순탄치 않은 한일 관계 예고
그런데 아베가 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산케이신문이 21일 자 조간에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이 21일 저녁에 서울에 도착해서 22일 박 당선인을 만나 친서를 전달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아사히(朝日)신문 등은 아베의 친서에 ‘양국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나는 (외)할아버지(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아버지(아베 신타로 전 외상)처럼 한국의 지도자와 개인적 신뢰 관계를 깊게 해서 발전적 외교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 담길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 당선인 측은 강하게 반발하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일정을 아베 총재 측이 멋대로 발표했다.” 박 당선인 측 관계자는 “20일 아베 총재 측에서 특사를 보내겠다는 뜻을 전달해와 이를 ‘검토해보자’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을 뿐”이라며 “자민당에서 우리 측을 떠보기 위한 ‘언론 플레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당시 외교부 관계자는 “아베 총재 측에서 특사를 보내고 싶다고 해서 ‘시기를 조정하자’고 했는데 자민당 쪽에서 ‘특사 파견’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 사건의 전말”이라고 밝혔다.
대선서 ‘친일파의 딸’ 비난받은 朴의 경계
박근혜는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야당으로부터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거 행적과 관련해 ‘친일파의 딸’이라는 공세를 받으며 곤혹을 치렀습니다. 당시 민주통합당과 일부 시민 단체는 박정희의 만주군 복무 경력을 문제 삼으며 역사 인식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 후보 측은 “부친의 공과는 역사의 평가에 맡길 문제”라며 색깔론적 네거티브 공세라고 반박하는 데 적지 않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박정희 대통령과 친하게 지냈다”는 아베와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박근혜에게 정치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2013년 2월 22일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주최한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차관급 인사를 처음으로 파견하자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 억지 독도의날 폐기 , 내각관방 독도전담부서 철회 규탄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반일 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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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도 ‘다케시마의 날’이 문제
이 같은 배경 외에도 당시에도 지금처럼 ‘2월 22일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표기)의 날’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베는 26일 ‘한국에 특사 파견’을 발표한 기자회견에서 ‘다케시마의 날’을 정부 행사로 개최하는 공약과 관련, “정권의 공약과는 별개다. 종합적인 외교 상황을 고려해서 생각하고 싶다”며 정부 주최로 이 행사를 하는 것에 대해 ‘유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본 특사에게 ‘무신불립’ 강조
박 후보가 한 차례 아베의 특사를 거부한 끝에 2013년 1월 4일 특사 접견이 이뤄졌습니다. 박 당선인은 1월 4일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당선인 접견실에서 아베가 보낸 특사단을 접견했습니다. 박 당선인은 누카가 후쿠시로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등 자민당 의원 3명으로 구성된 일본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한·일 양국의 신정부 출범을 계기로 국민 정서에 맞는 신뢰를 구축하고 우호 관계가 긴밀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또 “새 정부가 초기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앞으로 역사를 직시(直視)하면서 화해와 협력의 미래를 지향해 나가야 하며 한·일 양국 간에 꾸준히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박 당선인의 이날 언급은 아베 정권이 ‘다케시마의 날’ 정부 주최, 일본군위안부(성노예)에 대한 일본 정부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 폐기 등을 주장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경고’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달 14일 일본 나라현 호류지를 방문해 악수하고 있다./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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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다케시마의 날에 첫 차관급 보내
그러나 아베의 특사가 다녀간 지 두 달이 채 안 돼 박근혜가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2005년부터 일본 시마네현이 주최하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아베가 자신의 공약대로 일본의 차관급 공직자(외무성 정무관)를 보내 의미를 부여한 겁니다. 아베의 ‘독도 도발’에 대한 파장은 컸습니다. 조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일본은 ‘독도의 날’ 조례를 즉각 철폐하고 독도에 대한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중단할 것을 다시 한번 엄중히 촉구한다”고 밝혔습니다. 외교부는 구라이 다카시(倉井高志)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외교부 청사로 초치 후 이 같은 입장을 일본 측에 전하며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독도를 관할하는 경상북도의 김관용 도지사는 경북도청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에 차관급 관리를 파견한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라고 규탄했습니다.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다케시마의 날에 항의하는 시위가 잇달아 열렸습니다.
박근혜는 자신의 취임 3일 전에 일어난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특사 파견 소동에서 보여준 가벼움, 다케시마의 날에서 보여준 오만한 행동으로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가 아베에게 느낀 이 감정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한·미·일 3국 협력을 바라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개입으로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가 맺어질 때까지 아베와의 냉랭한 관계가 계속됐습니다.
1주일 후 다카이치는 어떤 선택?
14년이 흐른 지금, 이재명-다카이치 관계는 외견상 순조로워 보입니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 시절엔 후쿠시마 원전 오염 처리수 방류에 대해 “제2의 태평양 전쟁”이라고 말하는 등 반일적인 인식을 드러내왔습니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외교적 연속성과 국익을 강조하며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온 강제징용 제3자 변제 해법을 수용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기조하에 이 대통령은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다카이치와 첫 회담을 가졌고, 이후 G20 정상회의와 일본 나라현에서 세 차례 만났습니다. 셔틀 외교 복원과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하며 관계 개선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앞장서며 ‘야스쿠니 마니아’로 활동해 온 우익 강경파 다카이치와 이 대통령 간 신뢰 관계가 완전히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다케시마의 날’ 행사가 시험대입니다. 다카이치는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각료가 당당히 (다케시마의 날에) 참석하면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 교도통신은 최근 일본 정부가 각료 참석을 보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영토 문제 담당상이 불참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중·일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국과 불필요한 충돌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됩니다.
우리 입장에선 ‘다케시마의 날’ 자체도, 일본 정부 고위 인사의 참석도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다케시마의 날에 참석하는 일본 정부 인사를 각료급으로 격상하는 것은 또 다른 파장을 낳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다카이치가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그래서 이재명-다카이치 관계가 박근혜-아베와는 다른 경로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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