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리크 라흐만 방글라데시 새 총리 취임
2대 걸친 정치적 비극에 “복수 대신 화해” 천명
15세에 아버지 주검 목격한 소년
‘피의 악순환’ 끊을지 시험대
타리크 라흐만 방글라데시 총리가 취임 선언서를 읽고 있다.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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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총리 아들, 비선실세, 무기수, 망명자, 그리고 총리’
17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사내가 총리에 올랐다. 17일 오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국회의사당 광장. 타리크 라흐만(60)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 총재가 총리 취임 선서를 했다. 30년 만에 방글라데시의 남성 총리다.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지난해 12월 귀국한 지 두 달의 만이다. 2024년 8월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가 축출된 뒤 처음 치른 총선 결과에 따른 것이다.
타리크의 BNP는 12일 총선에서 전체 300석 중 212석을 쓸어 담았다. 아버지는 군부에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정적의 탄압 속에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본인도 17년간 고국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는 부모의 비극을 딛고 화해의 시대를 열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피의 복수를 시작할 것인가를 놓고 기로에 서 있다.
◇15세, 아버지 죽음을 목격하다
타리크의 삶은 방글라데시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버지 지아우르 라흐만(1936~1981)은 1971년 독립 전쟁의 영웅이었다. 당시 동파키스탄이던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할 때 치타공 라디오 방송국에서 독립을 선언한 인물이다. 1977년 대통령에 올라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국가의 틀을 세웠다.
방글라데시 다카 내 한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 유세 차량의 모습. 지아우르 라흐만(왼쪽 첫 번째), 타리크 라흐만(가운데), 칼레다 지아(오른쪽)의 사진이 그려져 있다.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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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에게는 씻기 어려운 의혹이 따라붙는다. 1975년 8월 15일 방글라데시 독립 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1920~1975) 초대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로 가족과 함께 살해됐는데, 지아우르 라흐만이 암살의 배후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된 뒤 암살범에게 면책을 부여하는 조항을 헌법에 넣은 것도 그였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딸이 전임 총리이자 아와미연맹의 대표 셰이크 하시나다. 하시나는 암살 당시 서독에서 유학 중이라 화를 면했다. 아버지를 죽인 의혹을 받는 자의 유족이 BNP를, 아버지를 잃은 딸이 아와미연맹을 이끌어온 셈이다. 두 가문의 50년 악연은 여기서 비롯됐다.
비극은 지아우르 라흐만에게도 찾아왔다. 1981년 5월 30일 새벽 치타공 숙소에 머물던 그는 또 다른 군부 세력의 총탄에 쓰러졌다. 시신에서는 총알 27발이 발견됐다. 향년 45세. 아버지의 주검을 목격한 타리크는 그때 겨우 15세 소년이었다.
◇‘수줍은 주부’, ‘철의 여인’되다
어머니 칼레다 지아(1945~2025)는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15세에 군 장교와 결혼한 평범한 가정주부. 36세에 남편을 잃고 지지자들의 권유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남편을 죽인 세력이 세운 에르샤드 군사독재(1982~1990) 시절 일곱 차례나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1991년 총선에서 이겨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칼레다 지아의 집권기는 방글라데시 경제가 도약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1차 임기(1991~1996)에 부가가치세(VAT)를 도입하고 민간 주도 산업정책을 폈다.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고 무상으로 전환했으며, 여학생은 고등학교까지 학비를 면제받게 됐다. 빈곤층 자녀의 등교율을 높이려고 ‘교육 급식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2012년 칼레다 지아가 유세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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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임기(2001~2006) 성과는 더 눈에 띄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해마다 6%를 웃돌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482달러까지 올랐다. 외환보유고는 10억달러에서 30억달러로 세 배 불어났고, 해외 근로자 송금도 19억달러에서 48억달러로 150%나 뛰었다. 빈곤율은 48.9%에서 40%로 떨어져 약 1300만명이 가난에서 벗어났다. 2006년 포브스가 “빈곤국에서 강한 GDP 성장을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이 시기 방글라데시는 국제투명성기구 부패 인식 지수에서 4년 연속 세계 최하위를 기록했다. 아들 타리크 라흐만이 이끈 ‘하와 바반’(측근들의 사무실이 모인 건물 이름에서 유래)이 비선 실세 노릇을 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정권 말기를 뒤흔들었다.
하시나 정권(2009~2024)이 들어서자 칼레다 지아는 부패 혐의로 17년형을 선고받았다. 2018년 수감된 뒤 760일을 독방에서 보냈다. 해외 치료 요청은 18차례나 거부당했다. 2024년 8월 하시나가 축출된 뒤에야 풀려났지만 이미 건강이 크게 나빠진 상태였고, 지난해 12월 30일 80세로 숨졌다. 그의 죽음이 BNP 압승의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타리크는 도벽 정치의 상징”
타리크 본인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머니 집권기인 2001~2006년 ‘하와 바반’에서 공식 직함 없이 실권을 휘둘렀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6년 미 국무부 외교 전문은 그를 “도벽 정치의 상징”이라고 적었다.
2007년 총선을 앞두고 하시나의 아와미연맹이 대규모 시위와 총파업을 벌이자 군부가 과도정부를 세웠다. 타리크는 군부에 체포돼 18개월간 갇혀 있다가 2008년 치료를 명목으로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상 망명이었다. 하시나 정권은 그에게 84건의 혐의를 들이댔다. 가장 무거운 건 2004년 수류탄 테러다. 아와미연맹 집회에 수류탄이 날아들어 24명이 죽고 300여 명이 다쳤다. 하시나도 청력을 잃었다. 타리크는 배후로 지목돼 2018년 궐석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셰이크 하시나가 사임한 날 방글라데시 다카의 시위대 /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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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그는 화상회의와 메신저로 당 조직을 챙겼다. 전환점은 2024년 학생 시위였다. 그해 6월 고등법원이 1971년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공무원직 30%를 배정하는 쿼터제를 부활시키자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하시나 정권의 정실 인사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유엔 인권사무소에 따르면 7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최대 14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 가운데 12~13%가 아동이었다. 1만1700명 넘게 구금됐고 1만3500명 이상이 다쳤다. 8월 5일 하시나가 군용 헬기로 인도에 망명하면서 15년 철권 통치가 막을 내렸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과도정부 수석 고문에 임명됐다. 아와미연맹은 활동이 금지됐고, 하시나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법적 상황이 바뀌자 타리크의 혐의도 뒤집혔다. 2024년 12월 고등법원이 수류탄 공격 사건에 “정치적으로 조작됐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지난해 9월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12월 25일, 타리크는 가족과 함께 17년 만에 다카 땅을 밟았다.
무함마드 유누스/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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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크 총리는 외교 노선의 전환을 예고했다. “델리(인도)도, 핀디(파키스탄)도 아닌 방글라데시가 먼저”라는 것이다. 하시나 정권의 친인도 기조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다.
인도는 15년간 하시나 정권을 뒷받침한 우군이었다. 타리크는 국경 분쟁, 티스타강 물 분배 문제 등에서 인도에 비판적이다. 하시나가 인도에 머물고 있는 것도 양국 관계에 부담이다. 방글라데시 법원은 하시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송환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반면 중국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질 전망이다. 2015~2025년 중국이 방글라데시에 투자하기로 약속한 금액만 301억달러에 이른다. 타리크는 일대일로 참여 확대를 공언했다. 인도도 모디 총리가 BNP 승리 직후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자이샨카르 외무장관은 칼레다 지아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다.
◇보복 정치 수레바퀴, 이번엔 멈출까
방글라데시 정치사는 집권 세력이 상대편을 짓밟는 역사의 되풀이였다. 2009~2024년 하시나 정권에서 BNP 인사 상당수가 감옥에 갇히거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제 BNP가 권력을 쥐면서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온다. 방글라데시 정치학자들은 이를 ‘베굼(무슬림에서 여성에게 붙이는 존칭)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타리크는 취임 일성으로 “복수가 아니라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화해위원회 설치, 총리 임기 2선 제한, 부패 척결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아와미연맹 활동 금지, 하시나 사형 선고 같은 조치가 과연 화해와 양립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이렇게 내다봤다. “타리크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당 안에선 권위를 세워야 하고, 밖에선 절제를 보여줘야 한다. 17년 망명 생활에 공직 경험은 없다. 초반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이 정권 교체의 성격을 가를 것이다. 새 출발이냐, 또 다른 대결의 서막이냐.”
1997년 칼레다 지아(왼쪽)와 셰이크 하시나/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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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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