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관련 사항 면밀 검토
민관 합동 숙의 대응방안 마련”
일본에 긴장 고조 말자는 신호도
전문가 “한-일 정부 충돌보다
전범기업 사죄하며 문제 풀어야”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30일 대법원 판결 뒤 정부는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부처 대책 회의를 열고 ‘대국민 정부입장 발표문’을 냈다. 여기에는 사법부 판단 존중과 피해자 지원이라는 원칙은 명확히 하면서도,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고민이 담겨 있다.
우선,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며, 대법원의 오늘 판결과 관련된 사항들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법부의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삼권분립 원칙’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우리 행정부의 대응을 촉구하는 일본 정부에 방어막을 친 셈이다. “국무총리가 관계부처 및 민간 전문가 등과 함께 정부의 대응방안을 마련해나갈 것”이라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상처가 조속히 최대한 치유될 수 있도록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로 “한-일 양국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나가기를 희망한다”고도 밝혔다. 당분간 한일 관계 냉각은 피할 수 없더라도, 양국 정부가 긴장을 지나치게 고조시키지 말자는 ‘신호’를 행간에 담고 있다. 그만큼 이번 판결의 파장과 맥락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개인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멸했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이번 판결은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근거로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점을 들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맺을 때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강제병합조약 등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표현으로 애매하게 넘어간 데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한국은 처음부터 ‘식민지배는 불법’이었다고 해석하고, 일본은 ‘합병 당시에는 합법이었으나 1965년에는 무효’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 이는 2차대전을 처리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한국이 전승국으로 참가하지 못한 전후처리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이 이번 판결에 대해 “양국 관계의 법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일본으로선 한국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면 전후처리 전체의 둑이 무너지게 되고, 중국·동남아시아 등에서 전후처리를 모두 다시 해야 하고 북-일 교섭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우려한다”고 설명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양국이 오랫동안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판결로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들의 국내 자산에 강제압류 조처도 할 수 있게 됐지만, 일본 정부는 강제집행 등의 조처가 이뤄진다면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으로 맞서겠다는 입장이다. 욱일기 논란과 일본 군함의 관함식 불참, 화해·치유재단 해산 절차 돌입에 이어 한일 관계에 난제가 더해졌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로 한일 관계가 극단적인 파탄에 이를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외교적 노력에 따라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원덕 교수는 “당장 일본과의 외교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정부나 피해자들이 일본에 법적 조처를 하기 전까지 일본이 먼저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선 정부가 국내 특별입법 등을 통해 ‘개인 청구권’에 대한 사법부 입장과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재단·기금 설립 등으로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면서 일본과 외교를 해나갈 시간이 있다”고 말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도 “한일 정부가 전면에 나서 충돌하기보다는, 일본 전범기업들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화해, 배상하면서 문제를 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신일본제철, 미쓰비시를 비롯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으로 세워진 포스코 등이 출연한 재단을 만들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나치의 강제노역으로 이익을 얻은 기업들의 돈을 출연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게 한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모델로 하자는 것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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