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비판하고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등 보수적인 가톨릭 교회 안에서 진보적 사제로 꼽혀 온 윌턴 그레고리 워싱턴 대주교가 새 추기경에 지명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5일(현지시간) 미사에서 그레고리 대주교 등 신임 추기경 13명을 깜짝 발표했다.
시카고 출신인 그레고리 대주교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진 않았다. 6학년이던 1958년 가톨릭 교구 학교에 입학한 뒤 6주 만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학교는 흑인 학생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두고 회의를 열 정도로 인종차별이 만연한 시절이었다. 흑인 학생이 입학하자, 백인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1973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2005년 애틀랜타 대주교가 된 데 이어 지난해 워싱턴 대주교가 됐다.
오는 11월 28일(현지시간) 신임 추기경으로 활동하게 된 윌턴 그레고리 워싱턴 대주교.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추기경에 지명됐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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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대주교는 인종차별 문제 등 여러 인권문제에 있어 단호하고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2002년 보스턴 교구에서 사제들의 성폭력 사건이 오랫동안 은폐돼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가톨릭주교회 의장을 맡고 있던 그는 ‘아동성범죄 신고 의무화’ 등의 규정이 담긴 헌정 채택을 추진하는 등 사건처리에 앞장섰다.
지난해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관들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전국적인 인종차별 철폐운동(Black lives matter)이 일자,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 6월 경찰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에 최루가스를 발포하는 등 강압적으로 대응한 다음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종교계 지지자들의 결집을 공략하며 요한 바오로 2세 성지를 방문해 사진을 찍고 돌아가자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어떤 천주교 시설도 이렇게 터무니없이 오용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요한 바오로 2세도 예배와 평화의 장소 앞에서 사진촬영 기회를 얻으려고 최루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지타운대학이 주최한 온라인 강연에서는 인종차별을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비교했다. 그레고리 대주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조용히 우리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며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됩니까. 집에서 배우나요. 우리사회의 구조를 통해 전달됩니까”라고 물었다.
지난해 8월 워싱턴 대주교에 임명된 뒤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시민들의 삶을 손상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미등록 이민자들을 위한 이민제 개혁안을 만들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기도 했고,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기후행동 계획을 세우는 데도 함께 했다.
2019년 6월 2일 워싱턴의 성어거스틴 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한 윌턴 그레고리 대주교.(맨 오른쪽) 워싱턴|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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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사제는 미국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차별받는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에 따르면 미국의 흑인 대다수는 개신교 신자이고, 약 5%가 가톨릭 신자이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가톨릭 사제는 3만7000명이고 그중 250만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그중 대주교는 그레고리 대주교가 이끄는 워싱턴과 루이지애나 두곳뿐”이라고 보도했다. 빌라노바 대 대학의 셰넨 윌리엄스 교수는 “수세기 동안 흑인 가톨릭 신자는 교회 내에서도 거의 힘이 없는 직책만 부여받았고, 흑인 교구를 이끌지 못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몇달동안 그레고리 대주교가 젊은 흑인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과 닮은 주교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상기시켰다”고 전했다.
미국 가톨릭주교회의 의장인 호세 고메즈 대주교는 성명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윌턴 그레고리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지명함으로써 미국 교회에 대한 희망과 포용의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그레고리 대주교는 추기경 지명 소식이 알려진 뒤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프란츠시코 교황을 잘 보좌하겠다”고 밝혔다.
추기경 임명식은 오는 11월 28일 열릴 예정이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추기경의 상징인 ‘빨간 모자’를 수여하는 의례가 진행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로 지명한 추기경은 미국 외에도 이탈리아, 미국, 필리핀, 몰타, 칠레, 르완다, 브루나이에서 나왔다. 13명 중 9명은 80세 미만으로 다음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브루나이는 이슬람교가 국교인 나라로, 이번에 처음 추기경을 배출했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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