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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월)

부모님 몰래 온 TK 장녀, 탄핵 깃발을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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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이색 깃발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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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들은 지역 명칭이나 다양한 구호를 넣은 깃발을 들었다. 두레와 마을 등 농촌 공동체를 나타내는 농기에 익숙했던 농민들이 깃발을 저항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1919년 3·1 운동에선 태극기가 가장 중요한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이었다. 국기 자체가 ‘독립’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시위 행렬의 선두에는 천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에게는 손으로 흔들 작은 태극기를 나눠줬다.



1920년대부터 국내에도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상징인 붉은 깃발은 전투 중에 착용한 붉은 머리띠나 수건에서 유래됐다. 전통적으로 바이킹이나 선원들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다는 투쟁 의지를 보일 때 사용했다고 한다. 백기와 정반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는 뜻이다. 1791년 루이 16세 폐위 요구 집회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추모를 계기로, 희생과 헌신의 의미가 더해졌다.



해방 이후 태극기와 인공기가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정치 테러 확산으로 한동안 깃발 자체가 금기시되는 엄혹한 시절이 도래했다. 정치적 저항을 일체 용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1960년 4·19 혁명과 1970년대 시위에서도 이어졌다. 대신 시위 현장엔 구호를 적은 펼침막이 선두에 있었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1987년 민주화 항쟁을 거치고 나서야 깃발 아래 모일 수 있었다. 집회장의 깃발은 강력한 소속감과 확고한 신념, 명징한 주체의식을 드러내는 저항의 상징이었다.(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 ‘집회와 깃발’)



12·3 내란사태 이후 연일 이어진 촛불집회에는 참가자들의 재기발랄한 깃발이 화제를 모았다. 기존 집회에서 단골로 보여진 학생회나 시민단체, 노조의 깃발 외에 ‘스타워즈 저항군 서울지부’ ‘전국설명충연합회’ ‘전국치즈냥연구회’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부모님 몰래 서울 온 티케이(TK·대구경북) 장녀 연합’ 등 새로운 유형의 깃발이 펄럭인 것이다. 앞서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에 등장했던 ‘햄네스티 인터내셔널’ ‘민주묘총’ ‘혼자 온 사람들’ 등의 깃발들이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기훈 교수는 “정치적 저항과 사회운동 주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고 놀이와 저항의 경계가 무너지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며 “2008년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에서는 (기존 운동단체의) 깃발을 내리라는 야유가 나오기도 했는데 2016년 집회 참가자들은 깃발을 거부하기보다 자신의 깃발을 들어 스스로를 표현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겨레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이색 깃발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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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과 2024년의 차이가 있다면, 기존 운동단체를 풍자한 패러디보다 참가자의 관심사를 드러낸 다채로운 형식의 문구가 좀더 많아졌다는 점일 것이다. 내성적인 성향임에도 집회장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은 ‘전국집에누워있기연합’ ‘(내향인)’이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을, 미식에 관심이 큰 참가자들은 ‘직장인점심메뉴추천조합’ ‘전국삼각김밥미식가협회’ 등의 깃발을 들었다. 또 ‘전국혈당스파이크방지협회’나 ‘전국허리통증호소연합’과 같이 건강 염려를 담은 깃발이나 ‘붕어빵 3개 1000원 협의회’처럼 물가를 걱정하는 깃발도 보였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느슨한 연대가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강고한 시민의 힘을 보여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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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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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연 논설위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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