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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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
감히 누가 내란 수괴 ‘윤석열 탄핵’에 반대할 수 있을까?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를 침탈한 행위 하나만으로도 윤석열이 내란을 주도한 수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를 옹호하는 집단이 아니라면 윤석열을 탄핵하는 것에 반대할 순 없다. 윤석열 탄핵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 중 하나여야만 하는 이유다.
하지만 12·3 내란사태가 윤석열을 탄핵하는 것으로만 마무리된다면 역사는 ‘박근혜 탄핵’이 그랬던 것처럼 ‘윤석열 탄핵’ 또한 시민이 승리한 역사가 아니라 패배한 역사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물론 탄핵은 민주적 헌정 질서와 상식을 회복하는 길이자,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치닫던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탄핵은 윤석열이 자행했던 온갖 기괴한 일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그러나 탄핵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윤석열을 탄핵하는 것만으로는 한국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 순 없다. 윤석열의 기괴한 국정운영이 한국 사회를 위기에 빠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가 직면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가 모두 윤석열 때문만이라고 말할 순 없다. 윤석열이 모든 악의 근원은 아니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자살률, 가장 낮은 출산율, 소득·자산 불평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위기는 이미 1990년대부터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괜찮아 보였던 성장도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2021)가 추정한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초 3.8%에서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1.9%로 낮아졌다. 203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회원국 중 가장 낮은 0.8%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저출생과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상쇄할 혁신 역량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2016~2017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탄핵이 한국 사회의 대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문제는 탄핵이 일부의 소망처럼 사회 대개혁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마다의 깃발과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12·3 내란사태와 같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명백한 악행에 맞서 두려움 없이 ‘거대한 저항’의 쓰나미를 만든다. 하지만 그 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위험엔 눈을 돌린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불공정한 학벌 경쟁을 통해 대를 이어 세습되는 사회가 공고화되어가고 있다. 대기업 집단에 편향된 경제가 좋은 일자리를 줄이고 비정규직과 같은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고 있다. 감세 정책이 국가 역량의 근간을 훼손하고 약자 복지라는 기괴한 정책으로 공적 복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정치는 사회경제적 전환을 지체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시민은 눈을 돌리고 있다. 시민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만든 시장 중심의 경쟁 질서에서 치열하게 각자도생을 모색하고 있다. 사회는 없고 개인만 있다는 신념을 내면화한 것처럼.
이번 12·3 내란사태를 겪으면서 국내외 언론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헌신을 상찬하고 있다. 하지만 명백한 위협엔 저항하지만, 민주주의의 토대를 갉아먹는 사회경제적 위험엔 눈을 돌리고 그 위험을 만든 구조를 내면화해 각자도생하는 시민이 ‘정말’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평등을 보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불평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험이다. 그래서 사회경제적 위험에 침묵하는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부족해, 시민이 피 흘려 만들고 지켜온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윤석열과 그 수하들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경제적 위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왕(王) 자 새긴 또 다른 윤석열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도널드 트럼프가 왜 미국인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촛불과 응원봉을 든 시민‘들’은 이제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 다시는 윤석열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의 수고를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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