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10주기 세미나 발제문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자비와 자만의 대립
‘자비(自卑)’와 ‘자만(自慢)’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양극단적인 시각을 상징하고 있다. 각각 ‘자기비하(自己卑下)와 ‘자기오만(自己傲慢)’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먼저 진보진영은 한국의 역사가 외국의 간섭과 내부의 독재로 얼룩진 굴욕의 역사로 본다. 이들은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하며 청산되어야 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대상들(친일파, 독재자 등)을 증오한다. 나아가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식으로 평가절하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자기비하적이면서 자주적이라고 자평하는 시각이 국사학계의 한 축에 주류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7년 12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전면에 등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과 한민당 세력이 이후 냉전세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세력으로 이어진 결과 주요 20개국(G20)에 가입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다가 민주화 세력의 리더인 김영삼 대통령까지 포함해 이들이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압축적 달성을 세계역사의 성공 모델로 상정한다. 이들의 시각을 다소 비판적으로 보면 ‘자만사관’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자비와 자만의 공존
위와 같이 한국현대사를 보는 시각은 자비와 자만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자비하기에는 너무 자랑스러우며, 자만하기에는 아직도 초라하다. 각각 ‘자기비하’와 ‘자기오만’에 치우친 양쪽의 편향적 사관은 모두 열등감의 산물이다.
자기반성은 긍정만큼이나 중요하며 건전한 역사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우리역사에 어찌 문제가 없었겠는가? 인권유린, 독재, 부정부패, 차별이 있었던 역사에 대 부끄러움, 분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화려한 초고속 성장 이면에 갈등과 분열이 출현했다. 양극화와 공동체 붕괴, 황금만능주의와 정신적 황폐, 민주주의의 정체와 금권주의, 사대주의 저자세 외교 등이 문제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보다 긍정적으로 보면 우리 현대사의 성과는 자비보다는 자만 쪽에 조금 더 가깝게 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겪으면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가 중간 중간에 있었고, 친일파 청산 등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지 못해 정의가 완벽하게 발휘되지 못한 측면도 있었으며, 외세의 존재가 부담되는 측면도 있었지만, 큰 흐름으로는 가난과 절망을 풍요와 희망으로 대치해나간 도정으로 현대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압축적 산업화와 단기간의 민주화를 순차적이지만 거의 동시에 달성함으로써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렀고, 제3세계의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의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성찰적 자긍사관
그러나,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선진국에 이르렀다고 하기에는 아직 문제가 없지 않으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북의 위협이 상존하여 안보가 불안한 것도 문제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선진화와 국민통합을 달성하여 진정한 발전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스스로 한국역사에 대한 겸허한 평가와 반성에 기반해서 희망찬 미래를 열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리더와 국민을 구분하고 계급을 대립적으로 보아 갈등을 조장하기보다는 한국현대사의 성과를 우리 국민 모두가 이룩한 결과로 평가하여 성공적 역사를 성찰적으로 조망하는 복합적인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공과를 균형 있게 고려해야 편향된 역사인식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 일변도의 자만사관도 문제이므로 긍정할 부분은 긍정하고 반성할 부분은 반성하는 것이 대안이다. 대한민국의 기적적 성취를 자긍하면서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한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는 통합적 사관으로서의 ‘성찰적 자긍사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찰하되 자비하지 아니하고 자긍하되 자만하지 아니하는 사관이다. 자기비하에서 자기성찰(省察)을 취하고 자기오만에서 자기긍지(矜持)를 취함으로써 ‘성찰적 자긍사관’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과 리더가 세계와 함께
기존의 평가에서는 주로 대통령 등 리더의 역할이 강조됐지만, 이제 우리 국민 모두의 성취라는 유기적(국민통합적) 평가에다가 미국의 후원이 미친 영향까지 포함해 성찰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건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건국은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에 기반하여 미국의 후원아래 대한민국 국민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48년에 이루어 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산업화로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발전된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역시 미국의 후원 아래 높은 저축율과 교육열에 기반해 투자를 활성화시킨 근면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피와 땀 속에서 총괄기획가 박정희 제5~9대 대통령이 이루어 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정립되었기 때문에 지속 가능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민주화)는 역시 미국의 후원아래 대한민국 국민들(민주화운동가들)의 희생 속에서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이 완성시켰다.
대한민국 국민과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대한민국 국민과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과 김영삼 대통령의 민주화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세의 기여가 작용했다.
◇논평: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모범사례/김영명 한림대 명예교수
김영명 한림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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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범 교수가 제시한 ‘성찰적 자긍사관’에 공감한다. 지금껒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좌파적 폄훼와 뉴라이트적 긍정이 대립을 이루었는데,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다. 민족분단은 우리로서는 불가항력이었지만 분단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지도력의 빈곤도 문제였다. 군사 독재로 오랫동안 고통 받은 것도 사실이었고, 친일파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그 잔재 세력이 대한민국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민국은 후진국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민주화, 산업화를 다 이룬 나라이며 이제 선진화의 길로 들어섰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국을 모범 사례로 인정한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공헌이 있으나 분단 고착에 공동 책임이 있고 불법 개헌과 부정 선거의 과오가 있다. 독재와 산업화의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고,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군사독재 하에서도 김영삼 등 민주화세력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가 합의한 87년체제는 많은 문제가 있으나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내세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민주화의 결실은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되어 김영삼 정부의 문민화로 심화되었고, 이후 김대중 정부를 낳은 평화적 정권 교체로 공고화되었다. 노태우는 군부 독재 세력이었으나 취임 후 민주주의 절차를 준수하였으며, 김영삼 정부는 문민화, 금융실명제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한층 심화시켰다. 말년의 외환위기 사태 때문에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민주화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핵심 문제였으나 이제 그 문제는 줄어들고 진영 싸움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진영 싸움은 지역과 이념이 개입되나 그보다는 오히려 순수한 권력 다툼이 본질로 보인다. 이런 진영 싸움을 극복하고 국민 통합을 이룰 통합적 지도력의 양성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경제, 사회, 문화, 윤리 등 모든 분야에서 법과 상식이 지배하는 제도와 행태를 갖추는 것이 진정한 대한민국의 선진화라고 본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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